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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예 정보

중세 시대의 역사와 미술, 장식품

by goodday25 2022. 1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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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는 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 유럽과 동양을 섞여 새로운 관습, 기술, 패션을 매우게 되었다. 또한 교회가 두 분파로 갈라지면서 동방 교화(비잔틴 제국)와 서방 교회(신성 로마 제국)의 스타일이 달라졌가. 당시의 성직자의 복장은 확고히 정해져 있었다. 중세시대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고 영향을 받은 미술부 분과 장식 부분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중세시대의 역사

유럽 역사에서 10세기 (476년 서로마 제국이 멸망과 9세기-11세기의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부터 르네상스(14세기-16세기)와 근세(1752년-2004년)가 시작되기까지를 중세( Medium aevum)라고 부른다.  중세를 크게 전기(High)와 후기(Low)로 나눈다.

즉, 935-1752 (약 817년)을 중세(Medium aevum)시대 라고 한다.

중세 초기

10세기 대부분 게르만족은 프랑크 왕국이나 동로마 제국에 흡수되었다. 프랑크 왕국은 로마 교황과의 유대를 강화하기 시작했으며 봉건제의 기반으로 교황과 군주와의 제휴가 되었다. 7세기에 독자적인 문명인 이슬람 문명을 만들어냈다. 1000년에 로마 제국의 황제로 대관되어 이에 카를 대제는 중세 유럽 세계라는 정치, 문화적 공동체를 만들게 된다. 민족 이동기의 쇠퇴했던 문화를 부흥시키고, 게르만·그리스도교·로마 등의 여러 요소를 융합하였다. 이 무렵의 유럽은 주종 관계가 일반화하기 시작하여 봉건제가 성립되었다. 

중세 성기

13~15세기 유럽 세계은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분열에도 가톨릭 교황의 권력이 강대해졌고, 로마 황제와의 권력투쟁이 전개되었다. 강대한 교황권을 바탕으로 십자군의 원정으로 나타났다. 1267년서 1453년에 걸쳐 이 원정은 경제, 정치, 교통 등 여러 면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십자군원정은 회교도들에게 점령된 성지 예루살렘의 탈환과 동로마 구원의 명분이었다.

중세 후기

17-18세기에는 십자군 운동의 십자군이 마침내 동로마 제국을 무너뜨리고 라틴제국을 건설하며  봉건제의 해체를 알렸다. 이것은 칭기즈칸의 유목 제국과 더불어 세계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럽은 십자군 운동 이후 이탈리아가 레반트 무역을 독점하고 무역과 도시발달을 추진하였다.  화폐 경제, 도시에서는 귀족 화한 상인 길드 혁명으로 공장제 수공업 화가 진전되었고 왕권이 강화되었다. 성직 귀족, 세속 귀족, 도시민을 대표하는 신분제 의회를 가지게 되어 중세 국가는 신분제 국가로 변모하였다.

역사 (- 미술부분)

비잔틴 회화

비잔틴식(式)의 장려(壯麗)한 모자이크 기법은 이 시대의 대표적인 회화이다. 비잔틴 시대는 사원에 장엄함을 주는 데 목적이 있어, 대리석뿐 아니라 뒷면을 색유리, 유리, 도자기 등의 도금한 소재를 사용해서 전체적으로 다채롭고 광택이 나며, 표현 효과와 색의 대비 효과 등으로 화려함과 숭고함을 표현한 것이었다. 모자이크는 작은 각 추대형(角錐臺型)으로 자른 색 대리석을 석회 벽 위에 끼워 넣어 회화나 도안을 그려내는 일종의 공예기술이다. 모자이크는 제작비가 많이 들므로 지방에서는 프레스코에 의한 벽화가 보급되었는데 동방적으로 도식화(圖式化)된 것이다.

장식 사본, 금공 예품

카롤링거 왕조 미술의 모습을 장식 사본(미니어처)·제기·성기류(聖器類)의 공예품에서 잘 전해 주는 것이다. 샤를마뉴는 의식으로서의 예배를 존중하여 성전(聖典)은 아름답게 금공(金工)이나 칠보(七寶)로 새겼다. 비잔틴 제국에서는 의전(儀典)과 성상 숭배를 존중하고, 인간존중과 자연주의를 사랑하는 고전의 부흥을 부르짖은 대제 밑으로 동방의 뛰어난 장공(匠工)이 옮겨 종교미술 제작의 중심이 형성되었다. 라틴적 또는 동방적 영향을 받는 사실 표현이 나타나 있다. 특히 금공품에 더욱 뚜렷이 나타나는데  성배(聖盃) 등의 미(美)는 재질 자체의 빛깔이나 광택, 금은(金銀)의 단조(鍛造)나 각선(刻線)으로 그려진 형상에 보석이나 칠보를 풍부하게 박은 성적 상자(聖蹟箱子)나 성서 표지, 또는 가공 기술상의 제약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그들의 기술은 색채 대비의 추상 미과 윤곽선을 발휘하였다. 

로마네스크 미술(Romanesque art)

기원후 약 1,000년부터 고딕 양식이 13세기 이후에 나타날 때까지의 미술을 말한다. 미술활동은 지방 양식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 로마네스크 미술의 특징의 중 하나가 되었다. 다양한 지방 양식에도 일괄된 공통점은 서유럽에 착실하게 뿌리를 박아가는 기독교 신앙이었다. 신앙의 대중화(大衆化)로의 과정이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각지의 작은 마을에서는 성상(聖像)으로 꾸미고 가꾼 교회가 세워졌다.

로마네스크의 공예

로마네스크 공예는 특히 금공(金工)과 칠보(七寶)가 발전하였다. 보석· 금은 상감(金銀象嵌)·색유리 등을 작품에 많이 활용하였다. 십자가·성기(聖器), 금단 조(金緞造)의 성적 상자(聖蹟箱子)에 잘 나타난다. 프랑스의 리모지는 금공과 칠보공예의 중심지였는데, 윤곽선을 남기고 판(彫) 금속판(金屬板)의 요부(凹部)에 불투명하게 만든 색유리를 녹여 넣은 독특한 기법을 채택하였다. 금속이 그리는 선과 윤곽선에 의해 둘러싸인 삭면(色面)이 강하게 대비를 이룬 가운데 소재가 지닌 아름다움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

고딕 미술(Gothic art)

12세기 말 북부 프랑스의 중세 미술 운동으로, 고딕 건축이 발달했다. 중세 유럽을 대표하는 미술 양식이 되었고, 고딕 미술 운동은 15세기경까지 계속되어 르네상스로 이어졌다. 고딕(Gothic)의 어원은 중세미술을 야만적인 것으로 생각하였던 르네상스 시대에 중세미술을 '고딕'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 그 기원이다. 

유리 회화

색유리의 사용은 이미 6세기 경이라고 알려져 있고, 스테인드글라스가 대표적이다. 공예적 전통에 많은 것을 의존하였기 때문에, 스테인드글라스는 상당히 오랜 기간, 중세 전기(中世前期)의 표현양식과 적색·청색을 대담하게 사용한 구도가 특색으로 되어 있다. 또 두께의 불균일(不均一)과 불순물의 혼입 때문에 그 조합에 따른 색의 변화가 아름다운 효과를 낸다. 유리의 제조 기술이 향상되고, 색이 균일화됨에 따라 열처리에 의한 보채기 술(補彩技術)이 생겼기 때문에 표현은 보다 정교하게 되나 오히려 유리그림으로서의 장식성이 상실되어 그 아름다움을 잃게 되었다.

 

중세 시대의 의복은 대다수는 단순해서 직사각형의 천 두장을 늘어뜨려 꿰맨 튜닉이 기본 복장이었다. 튜닉과 클로크는 울과 리넨을 옷감으로 삼았고, 유럽 북부 지역에서는 가죽과 모피 옷을 입었으며 중세 시대 내내 실크는 고가의 품목이었다. 

앞으로 중세시대의 의복과 패션이 어떻게 변화해서 입게 되었는지, 소재는 어떻게 변화되고 옷과 장신구의 발전에 대해서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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