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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예 정보

로마 제국의 문화와 의복

by goodday25 2022. 1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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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ncient Rome은 라틴어: Roma antiqua, 이탈리아어: Civiltà romana로 불리는 고대 로마는 기원전 8세기경의 오리엔트, 고대 그리스, 셈족, 서유럽 켈트, 게르만 등의 문화의 용광로라 불리고 있다.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마을에서 시작해 지중해를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을 이룬 고대 문명으로 법, 문화, 군사체제는 유럽, 동구권을 막론하고 현대 사회의 정치, 전쟁, 예술, 문학, 법, 건축, 기술, 언어 분야의 기틀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런 로마제국의 역사와 문화에 의한 의복을 살펴보겠습니다.

고대 로마의 역사

기원전 7세기경 로마는 지역 중심지의 도시 국가로 왕정 체제였으나, 기원전 509년에는 왕정이 사라지고 귀족과 평민 계급이 공화정을 만들었다. 귀족과 평민 간에 투쟁과 타협을 200여 년 이상 반복하며 로마 특유의 과두정 체제는 점진적으로 완성되었다. 이것은 고대 로마가 수백 년 동안 확장을 거듭하며 왕정에서 과두공화정으로, 점차 제정으로 변화하는 과정이었다. 이렇게 내부에선 신분 투쟁을 했으나, 외부에선 기원전 272년경 게누아(제노바)에서 이탈리아 최남단까지 거대한 동맹 체제를 수립했고, 지중해 전역을 제패했다. 기원전 1세기 말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로마 제정이 시작되 었다. 초기의 로마 제국은 그레코-로만 문화의 전성기를 보인다. 기독교 공인 후 교황 선출 문제를 기회로 로마제국은 동로마, 서로마로 나뉘게 됐으며 이민족의 침략으로 쇠퇴기로 들었다. 동로마 제국은 1453년 오스만 제국에 멸망한다. 서로마 제국은 멸망 후 프랑크 왕국, 신성 로마 제국 등으로 서유럽의 정치 세력들이 나타나게 된다.

로마의 문화

고대 로마의 중심지는 일곱 언덕이 자리잡은 로마 시였다. 이곳은 트라야 누스 포룸, 콜로세움, 판테온 등의 장대한 건물이 많았다. 고대 로마의 가옥구조는  전원 별장(villa)과 같은 구조를 볼 수 있다. 수도 로마 시에는 팔라티누스 언덕의 궁궐이 있었으며, 이곳은 상류층의 임대료 수입을 얻기 위해 지은 곳이기도 했는데 생활의 중심인 이곳에 콜레기움(collegium)이나 선술집(taberna)이 있었다. 로마시의 분수에서는 수백 마일 길이의 수도관을 타고 신선한 식수가 솟았으며, 체육관, 극장, 도서관, 가게, 시장과 상하수도를 갖춘 로마식 목욕탕도 있었다. 로마인은 문화의 창조보다도 선진 문화의 수용(受容)과 보급에 공헌했다. 일찍이 에트루리아 문화의 영향으로 아치 구축, 복점(卜占), 검투노예의 칼싸움 등이 발전하였다. 중요한 것은 에트루리아를 통해서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아  간접적으로 문자와 미술이, 직접적으로는 종교와 법률이 전해진 것 같다. 공화정 말기에는 로마 문화의 황금시대로 많은 정치가와 역사적 산문이 나왔으며, 문화적으로 취미·향락·전문적 지식을 과시하는 시기였다

종교

초기 로마의 종교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신념 체계라기보다는 숭배 의례이며 그리고 종교의 목적에 가까웠다. 로마의 신은 인격화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경계, 꽃, 곡물, 문 등 자연에 깃든 정령(numen)을 숭배하였다. 그들은 장소, 사물에 신성한 혼(genius)이 있다고 믿었다. 공화정 시대에는 엄격한 체제를 갖춘 사제들이 나왔으며 이들 사제들은 원로원 의원 출신이었다. 가장 높은 성직자는 최고 제사장 (pontifex maximus)으로 국가 종교의 수장으로 하고 국가 사제단(Collegium Pontificum)은 종교 제문을 보관하고 종교의식을 감독하였다. 제정 시대에 로마 사람들은 정복당한 민족들의 신화도 흡수하여, 외국신을 모시는 신전 옆에 전통적인 이탈리아 신전이 있는 경우도 생겼다. 최초의 기독교 박해는 기원후 64년 네로 시대에부터이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에 기독교는 로마 정부의 지원을 받았으며, 지배적인 종교가 되었다. 기원후 391년 테오도시우스 1세의 칙령으로 제국 내에서 기독교 외의 모든 종교 숭배가 금지되었다.

오락 활동

로마는 레슬링, 권투, 뛰기, 경주 등 여러 가지 놀이와 체육을 즐겼다. 부유층은 낚시와 사냥도 즐겼고, 핸드볼과 비슷한 구기 종목도 있었다. 귀족들은 보드 게임, 주사위 놀이, 도박도 즐겼다. 부자들은 저녁에 춤, 음악, 시 낭송과 같은 오락을 즐겼고, 평민은 모임이나 클럽에서 비슷하게 놀았다. 보통 후원을 받아 선술집에서 여는 모임을 뜻했다. 검투는 인기 있는 오락이었다. 검투사는 죽거나 혹은 여러 가지 시나리오에 따라 갖가지 무기를 들고 ‘첫 피’를 볼 때까지 싸웠다. 외국의 동물을 데려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거나, 동물을 보여주는 것도 인기 있었는데, 투수사와 싸움을 시키기도 하였다. 대경기장(circus maximus)도 로마에서 인기 있는 장소였는데, 주로 경마나 전차 경주를 벌이는 곳이며, 이곳에는 그 밖에도 여러 가지 행사가 많았다. 스포츠 말고도 대경기장은 시장과 도박판이기도 했다. 황제 등 정부 고위인사도 대경기장 경기를 관람했는데, 경기장에 참석하지 않는 일은 무례한 일로 여겨졌다. 대경기장은 기원전 600년에 생겼고, 기원후 549년에 문을 닫았다.
고대 로마인에게 목욕은 매우 중요했다. 고대 로마의 테르메(thermae)는 대규모 공중 목욕탕이다. 대부분의 로마 도시에는 테르메가 있었으며 목욕뿐만 아니라 독서와 사교생활의 중심지였다. 칼다리움이라 불리는 것은 인근의 강이나 개울에서 수로를 통해 물을 공급받은 뒤 불로 데워서 사용했다.

의류의 특징

로마사회의 의복은 신분에 따라 규정지어져 있었다. 남성의 경우 지위와 신분에 따라 토가를 입을 수 있느냐가 결정되었다. 또한 토가를 입는 자격이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계층에 따라 색깔이 달랐다. 자주색 옷은 황제만이 입을 수 있었고, 주주 색 줄 무의가 들러간 로브는 원로원 의원, 사제, 기마병들도 입을 수 있었다. 여성의 기본 의복은 스톨라였는데 피불라라는 브로치나 버클로 어깨에서 고정시켜 주름을 잡아 즐어트리는 스타일로 종종 가슴 아래쪽이나 허리에 벨트를 두르기도 했다. 귀부인들은 그 위에 팔라(숄)를 둘러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청색, 적색, 황색으로 염색이 가능했으며 간혹 옷에 자수를 놓기도 했다. 옷감은 울이나 리넨을 썼지만 부유층의 경우 실크가 수입되어 사용되기도 했다. 반면 노예나 외국인 포로는 수수한 튜니카(튜닉)를 입었으며 가죽 샌들이나 부츠를 신어 발을 보호하기도 했다.

왼쪽의 모습은 로마의 토가를 착장 한 모습입니다. 안에 받쳐 입었던 수부 쿨라(소박한 튜닉)를 입고 위에 토가를 입은 모습으로 토가를 입는 형태를 다양하게 연출할 수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몸을 감싸고 팔에 걸쳐서 드레이퍼리형으로 늘어뜨려 입는 토가는 기본적으로 반원형이었는데 수직 베틀을 이요해 일직선의 긴 테두리에서부터 모양을 잡아나가며 천을 짰다. 수부 쿨라와 토가, 그리고 칼 케이(구두)를 신은 모습이다. 착용자의 지위에 따라 좌우되었던 토가의 색과 에징을 잘 표현했다.

여자 운동선수의 경우에는 현대의 비키니 차림 같은 스타일도 발견되었는데 가슴둘레에 밴드처럼 두른 스트로 피움을 하고, 하의엔 리넨으로 만든 로인클로스를 입은 모습도 있었다. 남성이나 여성이나 머리손질을 중요시 여겼고 헤어스타일도 유행이 자주 변하였다. 남자들은 대체로 머리를 짧고단정하게 하고 수염도 깎았으며 부유한 여자들은 노예를 두고 크림과 칼라미스트롬(컬용 아이론 calamistrum)으로 머리를 치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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