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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연예 정보

스타일의 변화, 중세 시대 두 번째

by goodday25 2022. 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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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시대의 역사적 특징을 알아보면서 생활, 즉 의상과 헤어, 장신구 등에는 어떻게 영향을 받게 되었는지 궁금해지게 되었다. 특히 생각하지 못했던 베틀의 발달이 더 다양한 의류를 생산하는 기틀이라는 사실이 놀라웠고, 이것이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 알고 싶어 졌습니다. 중세시대별 변화와 직물의 생산과 염색에 관해 알아보았습니다.

 

중세 시기별 변화

600년~1100년

서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 침략과 정복, 새로운 곳에서의 정착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북유럽 지역으로 이주한 게르만족 등의 사람들은 추운 기후를 견디기 위해 따뜻하고 방수가 되는 옷이 필요했고, 그래서 울로 옷을 지어 입었고, 지중해 연안의 사람들은 리넨이나 울로 옷을 지어 입었다. 모두 넉넉한 튜닉을 입었는데 직사각형의 천을 여러 가지 형태로 꿰매서 허리띠를 매어 입었다. 이것이 남녀 기본 복장이었다. 튜닉 위에 맨틀(mantle, 클로크)을 걸쳤으며 계층에 따라 모피 라이닝을 입기도 했다. 남자의 경우 하의로 트루즈(trews )를 입고 무릎 아래에 울 밴드나 가죽을 둘렸다. 남자들의 경우 대부분 리넨 튜닉을 안에 받쳐 입고 오버 튜닉을 걸치는 형태로 튜닉을 두 개 겹쳐 입었고 언더 튜닉의 아랫자락이 오버 튜닉 아래로 드러나게 언더 튜닉을 더 길게 입기도 했다. 튜닉은 머리 위로 뒤집어쓰는 스타일로 목 앞부분에 슬릿(좁고 긴 트임)을  넣었고 칼라나 밴드로 장식했는데 대비 효과를 위해 다른 색을 사용하기도 했다. 튜닉은 누구나 입는 옷이지만 부의 정도에 따라 옷감의 질이 달라졌다. 귀족은 동양에서 수입한 금사, 자수의 실크 튜닉을 입었고 밝은 색의 원단을 비싼 염료로 물들여 착용하였다. 반면 평민은 천연 색인 회색, 갈색, 녹색, 청색으로 식물에서 얻은 색을 그대로 사용했다. 노동자들은 소박하고 거친 옷감의 튜닉을 레깅스와 함께 입었다. 의복에 화려한 자수, 태블릿 위빙(tablet weaving) 방식의 브레이드 , 정교한 장신구를 하기도 했. 리넨 셔츠를 튜닉 안에 속옷처럼 입기도 했다.  의복에서 사회적 계층의 차이는 그대로 드러났는데  여성의 경우 머리를 가리고 다녀야 했고, 옷이 곧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라 귀족이 아닌 사람이 귀족처럼 입는 것은 금지되어 금지법이 나오기도 했을 정도로 사회계층 간의 격차가 벌어져 부유층과 빈곤층의 차이가 더욱 크게 나타나는 시기였다. 

 

 

 

 

1100년~1300년

의복의 실루엣으로 처음 몸매가 드러내는 옷을 입기 시작하였다. 이전까지는 주로 직사각형이나 삼각형의 재단을 기본으로 옷을 만들었으나 이때부터는 끈을 이용하여 졸라매는 스타일을 이용해 곡선형의 몸에 맞게 입기 시작하였다. 평민 여자들도 허리, 팔, 엉덩이 부분이 붙는 스타일의 튜닉을 입고 남자들도 더 길어지고 타이트하게 입었다. 귀족의 경우는 남자, 여자 모두 블리오(bliaut) 또는 브리알(brial)이라는 값비싼 실크로 만들어진 옷자락이 땅에 끌리는 소매가 긴 튜닉을 입었다. 포인티드 롱 슈즈, 화려한 클로크와 맨틀, 길게 늘어트린 머리가 특징이었다. 이 시기부터 사제복과 의복 스타일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직물이 더 보편화되면서 상인계급이 귀족의 패션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이후 일명 사치금지령이라 불리는 계급별로 입을 수 있는 옷을 통제하는 법이 생겨나기도 했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의복 스타일은 점점 넉넉해졌고 남자와 여자 복장 모두 나타났다. 튜닉의 소매는 아래쪽은 조였지만 암홀은 여유 있었다. 서 코트 (surcoat, 슬리브리스 오버 튜닉)이 주된 복장이었다. 재단은 여전히 단순히 늘어뜨리는 스타일이었지만 헤드 드레스는 정교해졌다. 남자들은 머리에 작은 라운드 캡을 썼고, 곱슬머리가 유행했다. 여자의 경우 헤어네트(hairnet)나 윔플(chin band)을 하고 머리에 서클릿(circlet, 고리 장식)을 썼다. 

1300년~1450년

14세기엔 몸의 곡선에 맞추어 재단하는 맞춤복의 시대가 열렸다. 이 시기에는 여밈 방식이 중요하여 특히 단추 여밈이 주목 외어 앞섶 트임이나 꽉 끼는 긴소매에 단추를 활용하였다. 몸에 맞는 스타일이 나타났다. 옆이 트인 서 코트는 가는 허리를 더욱 강조했고 웨이스트 심과 벨트는 입을 부각했다. 남녀 모두 패드를 이용해 가슴을 커 보이게 강조하였고, 색의 조화 대신 대비 효과를 강조하는 미 파르티가 인기를 끌었다. 15세기는 바지의 도입과 지역별 스타일이 어우러진 시기였다. 우플랑드를 입기 시작했고, 패션과 의복은 더 복잡해졌다. 옷과 장신구의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직물의 종류도 많아지고 높아지면서 낭비가 동시에 생겨났습니다. 옷의 라인이 곡선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직물의 생산

1000년경 수평 베틀이 도입되기 전까지 유럽에서는 수직 베틀을 사용하여 바닥에 날실 추가 팽팽히 매달린 방식으로 직물을 짰으나 수평 베틀의 도입으로 좀 더 빠르게 옷감을 만들어냈다. 수평 베틀은 씨실을 날실의 위아래와 번갈아 교차시키면서 짜는 방식으로 수직 베틀보다 손쉽게 옷감을 짤 수 있는 방식이다. 베틀로 만든 옷감은 대체로 일자라인이 기본이었으며 낭비를 최소화하기 위해 천의 가장자리 부분을 이어 붙이기도 했다. (천의 가장자리인 변폭 selvedge에 다양한 색상이나 무늬를 넣어 장식의 효과를 내기도 했다) 12세기부터 14세기에 재단 기술이 발달하여 몸에 꼭 맞는 스타일로 변해가기 시작하였다. 수평 베틀의 대체로 직조의 속도가 빨라져 직물 생산량 늘어나면서 원단의 비용이 낮아지게 되었다. 새로운 스타일과 원단이 들어오 시 시작했고 양잠(실크 제조) 기술의 발달로 실크가 다양하게 쓰이기 시작했다. 무늬 실크, 브로케이드 실크, 금사 직물이 생산되면서 비싼  수입에 의존하지 않게 되었다.

직물의 염색

중세시대에는 염색 기술이 발달하지 못해서 일반 평민의 경우 색이 들어간  옷을 입기도 했지만, 대부분 천연 색인 옅은 회색이나 탈색한 흰색을 주로 입었다. 흔한 식물 염료로는 갈색, 황색, 청색의 색을 냈다. 염료는 매염제, 색을 천에 스며들게 하는 광물질로 색을 고착시켰다. 붉은색과 자주색은  염색이 어렵고 비싸서 전문 염색 공의 영역이었다. 

직물과 장신구

중세 시대의 사치품의 징표였습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금과 장신구는 정형화된 문양이 특징이다. 여성들은 커튼, 코프(케이프), 송에 장식하던 자수, 실크, 모피, 케르메스(적색 염료), 고급 울등이 사용되었다. 옷에 버트닝, 단추 구멍, 끈, 아일릿, 싸개단추, 커프스 커프스, 금속 애글릿등이 나타났다

 

중세시대에 나타난 다양한 스타일이 현대에도 많이 나타난다는 사실이 재미있었다. 특히 소매 커프스 부분에 장식 단추를 사용해서 트이고 주름 기법을 이용해서 소매 트임 부분을 강조하는 스타일은 지금도 디자이너들이 패션쇼에서 자주 보여주는데 중세시대부터 나타났다는 것이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좀 더 과거를 통해 많은 것을 찾는 시간을 가지도롤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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