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대 이집트의 사회
2. 고대 이집트의 예술
3. 사후세계
4. 의류의 종류와 특징
5. 이집트의 영향을 받은 디자인들.
고대 이집트의 사회
고대 이집트 사회는 굉장히 수직적이고 계층적인 사회였다. 이집트의 정점에는 파라오가 있고 파라오는 호루스의 현신이자 인세에 강림한 현 인신이었다. 파라오는 말 그대로 살아 숨 쉬는 신과 비슷한 대접을 받았고, 권위는 다른 문화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파라오 밑은 귀족과 사제 계급을 포함한 사회 지도층이 있었다. 이집트의 대신관은 파라오와 같이 막강한 권력과 지위를 가지고 있었는데 보통 파라오 본인이 아문의 대신관직을 맡거나 귀족들이 사제들과 결혼, 아니면 아예 신관직을 차지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에 사실상 동일한 계급이라고 본다. 이런 지도층의 귀족들과 신관은 평생 육체노동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고, 막대한 부를 누렸다. 이런 불평등한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고대 이집트에서 사회 반란이나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던 이유는 당시 이집트가 엄청나게 종교적인 사회였기 때문이었다. 사후 세계와 종교, 그리고 신에 대한 신앙이 강렬했던 이집트 사회였기에 신관들의 가르침은 더더욱 효과가 강력했다. 신관들은 평민들에게 참고 견디면 내세에서 영원한 삶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인구의 절대다수가 밭을 경작하는 농부들이었고, 생산량의 대부분을 세금으로 바치는 동시에 나라나 신전에서 하는 개수 공사나 운하 공사에 강제적으로 참여해야만 했다. 대부분의 농부들은 신전이나 귀족 대가문들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생산량이 높은 토지는 거의 지배층의 소유였다. 전문적인 기술을 가진 대장장이나 예술가, 장인 등은 농부보다 처지가 나았다. 이들을 중간에서 관리하는 중간계급들은 '백색 킬트 계급'이라고 불렸다. 이것은 눈에 잘 띄는 맑은 하얀색의 킬트로 만든 천을 두르고 다녔기 때문이다. 평민이나 농부들은 절대로 할 수 없는 옷차림이었고, 고대 이집트에서는 옷의 청결도나 재질만 보아도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나 계급을 판단할 수 있었다. 남녀의 경우에는 거의 비슷한 권리를 지니고 있었고 그 대우가 공평했는데, 다른 문명권들과는 다르게 여자에게도 계약을 체결할 권리, 결혼하거나 이혼할 권리, 상속받을 권리, 재산을 사고팔 권리, 소송을 걸 권리 등이 인정되었다. 이뿐 아니라 결혼한 이후에도 아내에게 독자적인 재산의 축적이 인정되었으며, 남편들에게는 자식을 부양할 의무가 존재했다. 클레오파트라 같은 여성 파라오들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도 이렇게 여성에게 개방적이었던 고대 이집트 사회의 분위기 덕분에 가능했다. 파라오를 제외하고 모두 평등한 관계라고 여겨서 노예 출신이지만 출세를 거듭해 재상직에 오르는 경우도 있었고, 역으로 대귀족 출신이었지만 노예 계급으로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노예들은 사유 재산으로 취급당했고 돈을 모아 자유를 살 수도 있고, 의사에게 정식으로 치료받을 권리도 인정받았다. 이집트인들은 외모에 매우 관심이 많았다. 귀족, 상인계급은 값비싼 염색 천으로 만든 옷과 보석으로 몸을 장식했고, 평민은 하얀 천의 단순한 킬트나 로인클로스를 걸치고 다녔다. 세계 최초의 비누도 나왔는데 동물 지방과 나무를 태운 재로 만들어 사용했다. 대부분이 나일강에서 목욕하며 때와 땀 등을 닦아냈다. 남성들은 청결을 위해 온 몸에 나 있는 털들 모두 밀고 ,피부에 향유를 바르거나 향수를 뿌리기도 했다.
고대 이집트의 예술
신과 파라오를 섬기기 위한 수단으로 예술이 사용되었다. 그래서 예술 그 자체보다는 신과 관련된 종교 예술이나 왕을 찬양하는 왕실 미술만이 발전하였다. 이집트의 예술은 엄숙하고 장엄한, 그리고 틀에 맞춰진 양식의 예술들이 발전했다. 수많은 벽화들을 봐도 거의 서있거나, 무릎을 꿇고 있거나, 앉아있거나 그런 자세들로 회화 속에서 매우 제한적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회화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사람 얼굴은 측면을 바라보고 있지만 몸은 정면을, 다리는 다시 측면을 향해 있다는 것이다. 남자의 경우 왼쪽 발을 앞으로 뻗은 상태로, 여자는 발을 가지런히 모으게 그렸다. 이것은 인체의 가장 대표적인 부분만 따서 그리는 걸 더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이집트 회화는 굉장히 상징성이 강했다. 4개의 색을 기본으로 백색을 나타내는 '헤지', 붉은색 계통의 색을 주로 하는 '데셰 르'', 초록색을 상징하는 '와지', 검은색을 의미하는 '켐' 삼았다. 각자 의미하는 뜻이 있었는데, 푸른색이나 초록색은 다산과 풍요를 상징, 검은색 역시 사후세계, 풍요와 나일 강을 상징했기에 주로 파라오들의 부장품을 검은색으로 많이 칠했다. 이집트인들은 금을 신들의 살로 보았고 은을 '백금'이라 부르며 신들의 뼈로 여겼다. 파라오를 태양신으로 묘사할 때에 붉은 암석을 사용했으며, 세트의 석상에도 붉은빛 돌들을 애용했다. 이집트인들은 금을 최고의 광물로 여기어, 변하지 않는 황금의 불변성을 신의 영원성과 결부시켜 금을 신성시했기 때문이다. 황금을 신들의 살로 여기어, 파라오의 관을 매장하는 무덤의 매장실을 '황금의 방'이라고 불렀다. 초기에는 은의 공급이 적어 심지어 금보다도 희귀한 금속으로 여겨졌지만 이후 중동 지방에서 막대한 은이 유입되면서 금보다 가치가 낮아졌다. 물론 은도 비싼 광물이어서, 금이 신들의 살이었다면 은은 신들의 뼈로 여겨졌다. 미신을 숭배했던 이집트인들은 부적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딱정벌레를 형상화한 스캐럽은 행운을 가져오고 반대로 액운을 막아준다고 해서 많이 쓰였다. 가장 애용하던 부적은 이시스의 매듭, 라피스 라줄리나 황금으로 만든 스캐럽, 혹은 호루스의 눈 등을 새겨 넣은 목걸이 등이었다.
사후세계
이집트인들은 사후세계를 믿어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평생 동안 내세를 준비했고, 죽은 이후에는 생전 가장 소중하게 여기던 물건들과 부장품과 함께 무덤에서 안식을 찾았다. 이집트 문명만큼 사후세계와 죽은 이후의 삶에 대해 관심이 많은 곳은 드물었다. 이집트인들은 사후세계에서 부활하기 위해선 현세의 육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었다. 오시리스가 다스리는 사후세계에서 부활하기 위해선 현세의 육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었다. 때문에 시신이 썩지 않도록 방부 처리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했는데, 이 과정 속에서 유명한 미라가 탄생한 것이다. 이집트에서는 고인이 세상을 떠나면 일단 시체를 곱게 눕혀 안치했다. 미라를 만드는 작업은 복잡하고 심혈을 기울인 작업이다. 인체 중에 심장만을 남기고 미라로 만드는 작업을 하는데 70일 정도가 소요되는데 이 시간도 이집트 신화 속에서 죽음의 신 오시리스가 70일 만에 부활했다는 이야기가 있고, 또한 하늘의 별 시리우스가 이집트 세계관의 천공에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주기에 의해 계산된 날짜 링 것이다. 미라 제작법은 파라오나 대귀족 들이나 하던 값비싼 최고급 미라 제작법이었다.
의류의 종류와 특징
이집트인들은 우 셰크를 하고 다니면 신들의 가호를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우 세크"란 고대 이집트 벽화를 보면 고위 계급들은 하나같이 목에 넓은 칼라 모양의 목걸이를 말하는데 주로 색칠한 돌 구슬이나 황금, 보석들로 만들었고 목 뒤로 끈을 묶어 연결해 달고 다녔다. 남자들은 모두 허리에 로인클로스를 입었다. 왕족과 고위층의 경우 로인클로스가 삼각형 모양으로 앞쪽에 툭 튀어나온 모습을 볼 수 있다. 마치 햇살이 퍼져나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으로 권력의 상징이었다. 여성들은 가슴을 드러내고 어깨끈으로 고정한 스커트나 리넨 천에 목둘레 선을 내고 양 옆 선을 앞으로 접어 허리띠를 맨 '칼라 시리스'를 입었다. 이 칼라 시리스는 남성과 여성 모두 입을 수 있었다. 이집트인들은 사막 기후에 살았기에 헐렁한 킬트나 바람이 잘 통하는 옷들을 주로 입고 다녔다. 평민 남성의 경우 기본적으로 허리에 로인클로스나 사각형의 천을 대충 두르고 허리띠를 매어 고정했다. 평민 여성은 상체의 가슴까지 가려야 했기에 롱 스커트와 비슷하게 생긴 잘록한 원피스를 걸쳤다.
부유한 남성도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무릎까지 내려오는 킬트를 걸친 것은 동일했으나, 그 위에 헐거운 셔츠나 망토를 걸치는 등 나름대로 꾸미고 다녔다. 고대 이집트 유물들 중 유난히 목걸이나 반지 등이 많은 이유는 너무 더워서 제 몸을 꾸밀 수단으로 긴 옷보다는 보석류나 황금을 이용한 액세서리류들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이집트의 벽화에서 묘사되듯이 이집트 무희들은 아예 벌거벗은 상태로 궁정에서 춤을 추기도 했고, 그 외에 망사로 만들어진 드레스나 몸에 딱 붙는 원피스를 입고 다니는 경우도 많았다. 하나 이는 오직 고위층들만 가능한 옷이었다. 이집트에서는 여성들도 고된 육체노동을 했기에 지나치게 얇은 옷을 입지 못했다. 고대 벽화에도 주로 부유한 젊은 귀족 여성들이나 왕족들이 이렇게 얇은 옷을 입고 다녔고, 그럴 여유도 경제력도 없는 일반 평민들은 이런 옷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집트인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가발을 착용했다. 이 가발 위에 향료를 섞은 밀랍을 얹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면 더운 날씨 때문에 밀랍이 녹아 가발 위로 흘러내리는데, 이 과정에서 향기가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이 가발은 보통 실제 인모에 야자수 섬유를 섞어 만들었으며, 컬을 많이 넣어 꼬불꼬불하게 파마한 머리처럼 만들었다. 그 외에 화장품도 많이 사용했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눈가에 '코올'이라 불리는 검은색 아이라인을 그렸다. 이는 미적 효과뿐만 아니라 뜨거운 태양빛이 눈에 들어오는 것을 일부 막아주는 것도 있었다. 입술에는 붉은색이나 동물 지방에 색료 늘 넣어 만든 푸른색으로 립스틱처럼 발랐다고 한다. 보통 파라오가 쓰고 있는 모자 하면 생각나는 줄무늬가 들어간 두건은 '네메스'라고 부른다. 파라오들이 들고 다니는 독특한 모습의 갈고리와 도리깨는 각각 '헤카'와 '네카카'라고 불렀는데, 원래 오시리스의 상징이었다. 갈고리는 왕권을 상징했고 도리깨는 풍요로움을 의미했다.
이집트의 영향을 받은 디자인들
이집트의 모든 것은 3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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